09. 로데오(2)_로데오 2층 2번 자리.
오늘은 「로데오」에 얽힌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로데오 건물 2층과 3층(옥상)에 자리한 「로데오」. 2층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카운터가, 왼쪽에는 4명 정도가 앉으면 적당한 테이블이 시작되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카운터에서 멀어질수록 테이블의 크기가 커졌던 것 같다.
몰려 다니기 좋아하는 대학생들에게 카운터에서 가까운 자리는 인기가 없었다. 전설적의 04학번 선배(06.대학촌 이야기의 그 분 맞다) 말에 따르면 학교에 둘 있는 술집인 「로데오」에는 아는사람들 천지였기 때문에 「로데오」는 혼자 가더라도 나올 때는 10명이었기 때문에 카운터에서 가까운 1번과 2번 자리에 앉는 일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맞는 말이다. 2005년도의 싱그러운 나에게 로데오 1-2번 자리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간혹, 자리가 없어 앉는 경우는 있었지만 먼저 앉아본 적은 없는, 그런 자리. 왠지 짬밥 좀 되는 OB형님, 누님들이 앉아 세상을 이야기 할 것 같은 자리 로데오 1-2번 자리.
2005년의 여름방학이었다. 여조교에게 금속공예를 배운다는 핑계로 귀가하지 않은 나는 격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형과 나는 생활비가 모자라 점심 한 끼를 세 끼 분량으로 먹어 버티고, 더울 때면 탁구장(지금의 교직원 식당)의 기업형 에어컨을 켜 두고 따뜻한 옷으로 무장한 채 탁구대 위에서 낮잠을 자곤 했다.
몇 없는 방학 중 학교에서 정형은 넉살좋게 밥사주는 선배와 동기를 잘 물어(?) 왔는데 밥사주는 선배(동기)를 섭외하고 약속을 잡으면 예정에 없던 내가 함께 나가 음식과 술을 마구마구-와구와구 먹어대는 것으로 먹는 것에 대한 갈급함을 달래곤 했다.
정형에게 빌붙어 먹는 것도 한두번이지, 두 자릿수가 되도록 먹을 것을 베풀지 못한 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탁구대 위에 누워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훑어본다. 사줄만 한 사람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누구라도 잡아야 한다. 그래서 내 연락처 마지막에 있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네 이름 대고 외상으로 뭣 좀 먹자" 동기이긴 하나 평소 왕래가 없던 H는 전화를 받고 매우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일만원 이내로 먹어"라며 H이름의 일만원을 허가하셨다. 날아갈 듯 기뻤다. 정형이 제공한 음식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지만 어쨌든 나도 해냈다는 마음에 정형을 불러 한달음에 교내 매점에 도착했다. (매점에서 당당하게 H가 곧 값을 것이라며 외상으로 참치 샌드위치와 실론티, 라면 등을 집어들었지만 곧 만원이 넘어 과자 몇 개는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H의 호감도는 급상승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여조교와 함께 공모전 작품 접수를 위해 방문한 대전에서 만난 H는 부여군에서 숙식할 때 본 것과 달리 광역시의 아우라를 풍기며 호감도 상승에 채찍질을 가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2005년의 핸드폰은 스마트폰이 아닌 피처폰이었고 'It's differnt'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SKY가 대세이던 시절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배 '큰박'이 「로데오」에 가자는 것이 아닌가. 조금 괴팍한 듯 또라이인가 싶지만 세심하게 챙겨주는 선배이면서 노래를 잘했던 02학번 '큰박'선배는 술을 못 마셨다. 그런 선배가 「로데오」에 가자고 하니, 무슨 일 인가 싶어 「로데오」 2번 자리에 앉았다.
역시 나였으면 절대 앉지 않았을 2번 자리를 택한 '큰박'선배는 여지없이 복학생 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핸드폰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에서 나와 2번자리로 가고 있는데 '큰박'선배 손에 나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선배, 뭐해요?”
"나? H에게 사랑한다고 보내고 있는데?”
“?!?!?”
아마 2005년 들어 가장 신속한 몸놀림이었을 것이다. 급히 핸드폰을 뺏어 '취소'버튼을 눌러댔다. 취소버튼을 누른 뒤에도 '전송중'이라는 글자와 함께 편지지를 접어 날아가는 애니메이션이 계속되었고 두 번 정도 편지지를 날려보낸 뒤에 '전송완료'가 뜨기 전에 메세지 보내기는 종료 되었다. 한시름 놓았다.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말없이 맥주를 크게 한모금 마셨고 '큰박'선배는 얄밉게도 "아쉽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위이잉 윙윙~"
H로부터의 전화. 나는 '큰박'선배에게 맥주를 뿜을 수 밖에 없었다.
급하게 머리를 굴려본다. 사실 H가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내가 택한 방법은 아니지만 여기서 물리기에는 상황도 우습고 마음은 아쉬웠다.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진심이야?" 또다시 2005년 들어 가장 큰 결심을 한다. '큰박'의 개입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응."
그렇게 스무 살의 첫 연애가 시작되었다.
스무살의 가장 신속한 몸놀림과 가장 큰 결심을 했던 곳.
그곳이 바로 「로데오」 2층 2번 자리.